아리조나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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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 허랑방탕한 삶으로 모든 것을 탕진하였음에도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집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음을 안다. 그가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적어도 아버지가 자신을 내어 쫓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관계 회복에 있어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관계회복의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하나의 성경구절로 요약하라고 하면 당연히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3장 17절의 말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듯하다.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도 복음을 발견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이 아니라 심판만 외치고 있지는 않은가? 전도자가 그 대상자를 두려움으로 정복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으로 나아온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고 왔느냐?”고 물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동기가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 누가복음 1장 75절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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